유럽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에 대한 단상

김 정 수

1. 들어가면서

마르크스의 머리를 가지고 마오의 손발로 뛰며 레닌의 구호를 외치던 시대에, 우리의 어떤 이론과 사상에 대한 이해는 사회적 콘텍스트를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 이론은 이론으로만 수입되었을 뿐 '특수한 적용'의 이름 아래 수출국의 콘텍스트도, 수입국의 콘텍스트도 사상된 채 '혁명의 탁상' 위에서 수 차례에 걸친 '변혁'을 거듭했다. 이미 죽은 베른슈타인과 유소기는 독일과 중국, 레닌과 마오보다도 살아있는 한국의 '혁명가'들과 더욱 치열한 이론적 논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맑스와 레닌, 마오가 '수정'과 '기회', '맹동'의 딱지를 붙인 사람들은 한국에서 그들의 추종자에 의해서 사상적 부관참시를 당했다.

과거 '좌파'라 일컬어지는 진영에 속해있던 사람들에게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딱지는 정치적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시대가 바뀌어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 같은 푸대접은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우리는 주변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극진한 환대나 은근한 시기만을 볼뿐이다. 극진한 환대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한국사회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며, 은근한 시기란 사회민주주의를 여전히 부담스러워하면서 완전히 수용하지도 배제하지도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어쨌든 '치욕의 80년대'를 넘어 90년대 들어 한국에서 색다른 유행으로 퍼지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유행이 색다른 것이라면, 신자유주의 비판은 소위 '좌파'진영에서 전면적으로 유행되고 있다. 장벽의 붕괴로 사상적 정체성을 상실한 한국의 '좌파'는 신자유주의비판에서 완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듯하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색다른 유행과 신자유주의비판에 대한 전면적 유행은 아직도 이론과 사상의 콘텍스트를 배제한 수입이 한국의 사상시장에 횡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 80년대 서구사회에 사회민주주의가 일방적으로 퇴조하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회적 컨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리고 90년대 들어 사회민주주의의 수정으로서 클린턴, 블레어, 쉬뢰더 등의 '신민주주의자'들의 '제 3의 길'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황적 이해를 배제한 열광과 실망은 또다시 이론을 위한 이론의 실패한 정체성으로 끝날 수 있다.

얼마 전 일부 노조위원장들을 상대로 한 강연회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자료를 검토하던 필자는 우연히 한 자료를 보게 되었다. 그 글은 이미 한국에서는 좌파진영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있는 나름대로 유명세를 가지고 있던 독일 유학생 출신인 한 교수의 글이었다. 독일의 노동운동을 검토한 그 글에서는 여성들의 복지수준이 남성들의 복지수준보다 낮다고 이야기하면서 독일에서 양로원에 할머니들이 약 80∼9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독일에서, 노인들 가운데 할머니들이 사회적으로 80∼90%를 차지하는 것은 상식의 수준이다. 따라서 양로원에서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보다 많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 보다 더 문제는 양로원이 개인 사택에 거주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든다는 것이다. 양로원에 거주할 정도면 매달 엄청난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든 예인 것이다. 현실의 컨텍스트를 무시하고 이론에 현실을 끼워 맞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많은 부문에서 '조립가공'의 수준을 넘어섰거나 넘어서고 있지만, 유독 이론과 사상부문에서는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복지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단지 이론의 수입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분석이라기보다는, 필자의 독일생활을 기초로 한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에 대한 체험담을 나름대로의 안목을 가지고 구성한 글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정서적 접근과 이론적 접근을 시도할 것이며, 이러한 접근을 통해 독자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2. 사회민주주의 - 자유민주주의의 반동

유럽의 정치에는 보통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라는 커다란 정치적 흐름이 존재해왔다. 이 외에 아나키즘, 코뮤니즘과 같이 정당으로서는 주요한 흐름에 속하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아직도 행사하고 있는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파시즘이나, 나치즘, 그리고 유로코뮤니즘과 같은 기존 정치적 흐름의 변종 등이 존재하지만 일부 국가들과 일부 역사적 시기를 제외하면 그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는 대체로 정당(political party)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당이란 말 그대로 특정 부분과 관련자, 이해당사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즉 이해 당사자들의 관련집단 혹은 관련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당은 특정한 이해를 가진 집단전체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당이 특정 계급의 당파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맑스의 정의는 전적으로 타당한 규정이 아니다. 또한 유럽의 역사와 현실에 비추어 볼 때도 정확한 규정이라고 할 수 없다. 유럽 여러 정당들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계급적 요인 이외에도 종교적, 문화지역적, 도시-농촌의 요인들이 개입하고 있다. 최근의 녹색당이나 특정 이해에 따른 군소규모의 정당, 그리고 회색을 지향하는 노인정당들의 출현 또한 정당을 계급적 이해의 대변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이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의 정치 사상들이 당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은 당시의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정치적 권리와 참여를 요구하며 이를 위해 정당을 요구했던 산업노동자들의 등장, 새로운 선거층의 동원을 필요로 하는 선거권의 확대, 도시화와 전국적 정치조직의 등장을 용이하게 하였던 교통과 통신수단의 발전, 그리고 다른 성향과의 구별과 유사성향들의 인입을 수월하게 하는 것으로서 정당은 유효한 조직화의 방식이었다.

세계적으로 정당을 배제한 정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당은 현재 보편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정당은 분명 역사적인 존재이다. 역사적인 존재라 함은 정당의 출발점과 성장, 그리고 언젠가는 유한한 존재로서 자신의 역사를 마칠 수도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실제로 정당의 역사가 처음으로 출발한 유럽에서도, 정당은 불과 2백년의 역사가 안된 존재이다. 유럽에서 최초로 정당의 역사를 장식하는 것은 보수주의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간의 탄생과 갈등이다. 보수주의 정당은 귀족, 특히 농촌의 토지귀족들의 이해를 대변했으며, 자유주의 정당은 도시의 부르주아와 소시민들의 이해를 대변했다. 이들간의 대립은 1848년까지 유럽의 정치를 규정지었다. 보수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세력의 핵심구호는 당연히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었다. 기존의 군주와 귀족, 종교세력에 대해 경제적 힘을 획득한 신흥 시민세력(경제적 부르주아와 정치적 시티즌)은 당연히 반종교적이고 반국가적 성향을 띠고 기존의 보수세력과 대결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신흥 시민계급들은 당시의 무권리 상황에 있던 산업노동자들과 연합하여 보수세력을 궁지에 몰아 넣었다. 하지만 자유주의세력과 보수세력은 사적소유에 관련해서는 공통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주의의 이러한 이중성은 나중에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자유와 평등의 구호에 대한 대응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사회주의 세력의 자유와 평등의 구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세력은 자유주의 우파로, 이들과의 공조를 강조했던 세력은 자유주의 좌파로 분열되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은 신흥 시민세력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대항개념으로서 제기되었으며, 이 말이 대중적으로 퍼지게 된 것은 라살레가 1863년에 조직한 최초의 노동자 정당이자, 사회민주주의 조직인 전국노동자협회의 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에 의해서였다. 이 조직은 베벨과 립크네히트 등 맑스의 동료들이 조직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과 연합하여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을 결성한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의 전신인 이 조직에 의해 사회민주주의는 이로서 유럽과 세계의 커다란 정치세력으로서 출발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상황을 한번 그려볼 필요가 있다. 당시 초기 산업사회의 노동자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무산자였다. 농촌에서 취업의 기회를 얻기 위하여 도시로 상경한 사람들은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이제 막 안전도나, 위생, 환경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오로지 똑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거대한 기계가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굳이 자본론의 거창함을 들먹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맑스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쪽에는 거대한 생산력에 환호하는 소수가, 다른 한쪽에는 거대한 생산력을 혐오하는 다수가 있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농촌에서 자신들이 몇 달에 걸쳐서 해야 했던 일들을 석탄더미를 뒤집어쓴 이 기계는 단지 몇 십분, 혹은 몇 시간만을 필요로 했다. 결국 자신을 농촌에서 쫓아낸 것도 이 기계였고, 자신의 현재의 비참함을 재생산하는 것도 이 기계라는 것이 당시 노동자들의 인식일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지식과 예리함을 겸비하고 사태를 비판적으로 고찰했던 사람이라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현실의 문제였다. 공상적 사회주의자이건, 과학적 사회주의자이건, 영국에 거주하건, 프랑스에 거주하건, 아니면 독일에 거주하건 이들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했던 것은 초기 산업사회의 현실이 대체로 유사했기 때문이다. 고도의 지적 능력과 날카로운 예지가 요구되는 이러한 문제와 자본주의의 미래와 대안은 그러나 영국의 오웬, 프랑스의 프루동, 독일의 라살레와 맑스는 서로 다른 처방과 대안을 제시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생산자조합 등의 이론과 실험을 통하여 자본주의 사회를 개혁하여 무계급사회로 진전시키려 하였으며, 라살레는 국가의 지원을 통한 사회의 복지를 실현하려 하였다. 실제로 라살레는 비스마르크와 사회입법을 통하여 현실적 타협을 실현하였으며, 비스마르크는 초보적이나마 복지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역설적이게도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을 최초로 실화하였다. 하지만 맑스는 계급투쟁을 통한 부르주아 사회의 지양과 무계급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역사와 현실은 맑스의 분석과 예측과는 달랐다.

3. 수정주의의 패러다임 : 사회민주주의의 탄생과 변혁

사회민주주의는 초기에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자본주의를 개혁하려는 세력과 포스트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혼재해 있었다. 자본주의 이후를 모색하는 세력은 개혁적인 방식을 지향하는 세력과 혁명적 방식을 지향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사회민주주의는 대체로 몇 단계의 패러다임 논쟁을 통해 정립되었다.

패러다임에 관한 첫 번째 논쟁은 국제노동자협회 내의 맑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간의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사회주의의 해방된 사회가 국가권력을 정복해야 하는가, 아니면 종국적으로 현존국가를 파괴하는 것을 전제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논쟁은 각 사회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는 서부 지중해에서 노동운동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논쟁은 제 2인터내셔널의 건설과 참가 세력들의 맑스주의 지지로 결국 맑스주의자들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로 아나키스트가 주장했던 시민적 사회와 정치적 국가간의 관계의 재정립은 오늘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동유럽에서 시민적 사회는 중앙계획적 국가에 대한 반국가적 기획이 되었다.

두 번째 논쟁은 1880년대와 90년대에 시작하여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독일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영국의 페비언주의 등등이 제기한 맑스주의의 수정은 패러다임을 둘러싸고 노동운동 내에 커다란 분화를 야기했다. 이 논쟁의 핵심은 목적의식적인 개혁의 전략 위에서 자본주의의 복잡한 경제가 점차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붕괴 이후에야, 즉 자본주의의 기능방식과 논리의 단절 이후에야 사회주의적 대안의 건설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개혁주의자들이 당을 실천 속에서 개혁의 전략에 붙들어 두는 것에 만족하고, 이론과 프로그램을 단순히 선언적 수준화 하고자 하는 반면, 수정주의자들은 일관된 개혁전략을 진정으로 보장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보장하기 위하여 근본적인 이론과 프로그램의 새로운 정립을 원했다. 이 수정주의는 오늘날까지 사회민주주의의 본령을 형성하였다. 수정주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인정하고 노사정의 대타협을 통해 자본주의를 문명화하고, 자본주의를 사회화하는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하였다.

세 번째 논쟁은 노동운동을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분파로 분화시켰다. 이 논쟁의 핵심은 '프롤레타리아독재'가 사회의 전환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는 입장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동등한 무게와 비중을 가지고 동시에 전진하는 것이며 민주주의로부터의 이탈은 사회주의적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두 부류이다. 동구권의 붕괴는 이 이론적 논쟁을 현실적으로 매듭지었다.

네 번째 논쟁은 기존 논쟁과 달리 사회주의의 전략에 대한 문제를 넘어선 사회모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성장의 개념, 생태적 위기, 사회적 기술조종과 노동의 미래, 사회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에너지생산, 새로운 개인주의 등이 여기서 중요한 문제이다. 한마디로 새로운 수정주의에 관한 논쟁이 그것인데, 이것은 두 번째 패러다임 논쟁이 개혁정치적 점진주의에 관한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산업주의적 시민문명 모델의 비판적 재구성 자체이다.

패러다임의 변화와 모델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과 사회의 변화는 당연히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운동, 좌파의 정체성과 무관할 수 없다. 70년대 말 이후 본격화된 사회민주주의와 노조의 위기는 정체성의 위기였으며,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좌파정당과 노조는 자기 변신을 시도했다. 블레어의 이른바 '제 3의 길'이 이러한 결과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두 번째 수정주의는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의 변혁이며, 사회민주주의가 과연 시대와 사회적 변화와 도전에 응답할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시험이다.

그러면 왜 전통적 사회민주주의는 왜 새로운 수정주의를 요구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4. 사회민주주의의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모델 - 일국적 케인즈주의의 붕괴

독일은 한국에서 스웨덴과 더불어 복지국가의 대명사가 되어왔다. 그러나 필자는 독일에 살면서 복지의 혜택뿐만 아니라 복지의 폐해 또한 목격할 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라 평가되는 복지국가는 그러나 결국 사회민주주의의 발목을 잡았다. 대처의 등장으로 새로운 흐름이 예감되던 80년대는 라틴 아메리카 뿐만 아니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에 있어서도 '잃어버린 10'년으로 기록되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는 복지국가의 위기, 케인즈주의의 위기로 표현된다. 케인즈주의는 주지하다시피 유효수효창출정책이다. 29년의 대공황 이후 유효수요의 부족이 자본주의를 파국적 위기로 몰고 갔다는 분석아래 국가가 공공지출 등의 정책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유효수요를 창출하고, 실업문제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케인즈주의에 기초한 복지국가는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보장과 완전고용과 국민적 보건을 기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와 사무직을 대상으로 한 사회보험과 의료보험, 연금보험, 질병과 산재보험, 실업보험과 노동자의 권리옹호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 출산과 육아와 관련된 보험 등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성립은 대체로 3가지의 전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완전고용을 보장하는 취업사회와 사회보장제도, 두 번째는 시장의 개입과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강력한 국가, 세 번째는 평균적 민주주의이다.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위기는 여러 원인과 복잡한 연관고리들을 가지고 있다. 복지국가의 위기는 일단 유효수요 확대정책이 재정적자를 심화시키고 국가의 경쟁력을 저하시켰다는데 있다. 국가의 유효수요 창출을 위한 재정지출의 확대는 한편으로는 국가의 적자를 심화시키고 채무를 증가시켰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상승시키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국가간의 경쟁력을 심화시켰다. 또한 70년대 초중반의 오일쇼크는 공급자측의 인플레를 촉진시키는 비용상승과 이로 인한 수지적자의 확대에 기여했다.

두 번째는 70년대 중반 이후 가속화된 자본과 상품시장의 국제화 완성으로 국가적인 자본과 화폐흐름의 조절력이 감퇴하고, 일국적 케인즈주의의 조절력을 담당하고 있던 국가의 일국적 경제정책의 위력이 반감되었다. 자본은 자신의 국적을 적극적으로 버리고 보다 싼 노동력과 좋은 판매조건, 좋은 생산입지를 좇아 자신의 활동무대를 세계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전제였던 강력한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게 되었다.

세 번째는 70년대 중반이후 본격화된 전자통신혁명으로 취업노동사회가 붕괴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새로운 혁명은 고용구조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활과 사회구조를 요구하였다.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또 다른 전제로서의 완전고용, 즉 풀타임에 기초한 평생고용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동요하고, 노동자를 기초로 성립되었던 사회보험 등 복지국가의 전제가 근본으로부터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네 번째로는 이로 인한 사회구조의 다변화와 이른바 노동계급의 차별화로 평균적 민주주의의 새로운 변화요구이다. 기존과는 달리 사회 속에서는 사회적 자율성, 정치적 참여, 성(性)의 평등, 환경보호 등 비물질적 구호가 등장하며 '성장+분배'를 넘어서는 모델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물질지향적인 블루 칼라와 비물질 지향적인 좌파-자유주의적 중산층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모델은 정치적 지반이 균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원인들은 복잡한 고리들과의 연관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면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5. 독일 복지국가의 위기

독일의 사회복지체제는 복지예산을 세수입에서 지출하는 네덜란드, 영국과는 달리 상당부분을 기업과 노동자가 분담하는 '임금관련체계'이다. 임금관련체계란 예컨대 노동자의 임금 중 9∼10%를 연금보험을 위해 지출하고, 사용자 역시 피고용 노동자들을 위해 같은 몫을 지불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독일 복지국가의 실질적인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57년 아데나우어의 연금개혁이다. 연금개혁은 피고용자가 실직 후에도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발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 연금개혁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핵심은 세대계약(generationsvertrag)이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현재 취업 중에 있는 층이, 은퇴한 세대와 취업이전 및 취업불능 층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것이다. 임금관련체계와 세대계약은 기본적으로 취업노동과 완전고용을 전제로 성립된 사회보장체계이다. 만약 취업노동과 완전고용사회가 붕괴한다면 독일의 사회보장체제는 근본이 흔들리게 된다.

현재 독일에서 의료, 연금보험, 아동지원, 빈민층 원조, 주거 및 교육비 지원으로 지출되는 사회복지예산은 원으로 계산할 때 약 5백조원이며, 이는 1인당 약 8백만원 정도이다. 이렇듯 엄청난 자금이 사회보장을 위하여 투입되면, 국가의 재정적자는 확대될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도 확대될 전망이다.

독일은 현재 전후 최대의 실업률을 보이고 있다. 실업률이 높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실업자에 대한 실업급여 등 정부의 예산지출이 높아지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연금보험, 즉 노년층의 생계를 감당하는 취업층의 수가 감소하여 연금보험의 계좌로 들어가는 돈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연금계좌로 들어가는 돈이 적다는 것은 노년층의 생활이 압박 받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독일을 포함한 유럽사회는 보건복지의 발전으로 노년층(65세 이상)이 증가추세에 있는 반면, 출생률의 감소로 청년층은 감소추세에 있다. 월드 리소스(world resource)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경우 65세 이상이 2∼3%에 불과한데 비해 독일을 포함한 유럽국가들의 경우 노년층이 전체 인구에서 14∼15%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비율은 2040년이 되면 22%로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사회보장의 기초가 되는 취업청년층이 줄어드는데 비해 퇴직노년층이 급속히 증가하여 사회보장제도 전반이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94년 현재 독일에서는 1백명의 취업층은 46명의 퇴직층을 부양하였으나, 2030년에는 96명의 연금수혜자를 부양해야한다는 유력한 예측이 나오고 있다. 노년층의 증가와 출생률의 저하로 인한 사회의 노년화 현상은 실업률이 높은 독일사회에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한번 취업에 뛰어든 이들은 일자리를 놓치려 하지 않고, 취업전선에 뛰어들려는 청년층은 완강한 취업자들의 벽에 부딪혀 실업자로 남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구의 변화 외에 독일의 사회보장제도에 커다란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성관계의 사회적 변화이다. 취업노동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은 완전고용된 남성노동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자기개발과 취업기회의 확대, 사회적 진출은 노동시장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취업가능인구의 확대로 이어지고, 이는 취업노동사회의 약화와 일자리의 축소와 결부되어 노동시장을 압박하고, 실업률을 증가시킨다.

6. 취업노동사회의 종말과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붕괴

독일 복지국가를 압박하는 실업의 가장 커다란 원인은 취업사회의 종식과 지식정보사회의 도래에 따른 사회구조의 변화에 사회민주주의적 모델과 노선이 적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0년대 중반이후 정보통신혁명과 자동화는 생산요소로서 노동과 자본, 지식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화시켜, 자본과 지식에 대한 노동의 경쟁력은 현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를 통해 전체 노동의 볼륨이 줄어들고, 일자리가 축소되었다.

현재 독일에는 약 4백만명의 실업자가 존재하며, 7백만개의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한다. 독일에서 취업노동총량은 91년 이후로 보면 10%, 80년 이후로 보면 17%, 65년 이후로 보면 32%가 줄었다. '정상노동관계' 즉, 취업사회의 완전고용관계는 독일에서 현재 55%(80년에는 80%)이고,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는 50%도 안 된다. 미국의 5백대 기업에서 정상노동관계는 불과 10%에 불과하다. 실업이 늘어나고 일자리가 점점 부족해짐에 따라 풀타임 노동은 정상적 노동관계에서 비정상적 노동관계로 전화하고, 파트타임 노동이 이를 대체하고 있다. 또한 풀타임 노동과 초과노동을 줄여 고용을 창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는 아직 파트타임 노동이 전체 노동의 볼륨에서 20%에 못 미치고 있다. 그러나 실업문제를 훌륭히 해결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경우 파트타임 노동은 전체 노동 볼륨의 약 34%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복지국가모델은 일국적 케인즈주의로, 완전고용 모델과 노동자 중심의 사회, 강력한 국가와 일국단위의 경제조정 능력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사회가 종식되고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하면서 완전고용은 이제 몽상이 되고 있으며, 자기책임과 능력이 강조되는 앞으로의 사회에서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임금과 사회복지를 보장받던 수동적인 노동자 중심의 사회구조는 퇴조할 수밖에 없으며,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일국단위의 경제조절 능력은 과거만큼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명백해졌다.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는 손, 사회의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손 간의 대타협을 실현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문명화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70년대까지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평등주의, 평균주의에 기초한 것으로 포스트 모던 사회로 이행하는 서구사회에는 맞지 않는 모델이 되고 말았다. 이 모델은 개인주의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양적인 지표 대신 질적인 지표가 우선하며, 절대적 잣대와 일률적 지표 대신 상대적 잣대와 차별적 지표를 요구하며, 계급적 지평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문제에 대응하기에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 낡은 모델이 되고 말았다. 계급문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제 - 노동자의 점차적인 이질화, 생활유형의 다양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의 상대화(자율적인 팀 아르바이트, 유동벨트를 대체한 독립적 활동, 극단적인 노동과 기능분화의 지양 등등)가 진행되면서 기존의 대립선, 즉 자본 대 노동, 좌파 대 우파 등의 대립은 상대화되고 체제 대 생활세계, 물질적 요구 대 탈물질적 요구와 같은 긴장분야가 생성되면서 기존 사회민주주의 노선은 수정을 강요당하고 있다. 사회적 욕구와 생태적 조건, 가치보수적 철학과 시민친화적 입지, 경제적 효율성의 요구와 사회적 책임 등 기존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는 가능하지 않던 새로운 동맹과 정치사회적 컴비네이션의 제기에 대해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는 결코 온전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7. 일하지 않는 자여 더 잘 먹어라!? -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명암

요즈음 들어 필자는 정치권에서 나오는 독일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 '독일식 복지모델', '독일식 민주시민교육', '독일식...' 등등 새로운 정부가 등장한 이후 독일에 대한 이야기는 역대 어느 정부 때보다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과거에 비해 독일이 한국의 사회개혁 대안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나라의 민주화가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앞으로도 더욱 성숙한 정치와 사회를 지향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독일이 능사는 아니다. 특히 복지와 관련해서 필자는 독일식 모델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드러내놓고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지만 노동계 대다수와 정치권의 일부는 복지문제와 관련해서는 내용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싶다.

독일에 살다보면 복지문제와 관련해 많은 점을 생각하게 된다. 독일의 복지체제는 마치 '잘하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먹을 수'있는 것과 같다. 체계가 복잡해 구체적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은 구석구석을 찾아내 온갖 혜택을 누릴 수 있다.

70년대와 80년대 독일에서 유학한 선배들은 90년대 유학을 하는 사람들과 달리 대체로 아이들이 많다. 그들의 상당수는 독일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를 3명 정도 가지면 일을 하지 않아도 교육비, 양육비 등을 타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의료보험의 경우는 보험비 지불능력과 병의 유무와 정도에 관계없이 원한다면 필요 없는 비타민제도 공짜로 탈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료보험은 늘 적자를 면치 못했다.

2년 전쯤으로 기억되는데 독일의 유력 주간지 슈피겔지는 사회복지의 사기꾼들을 커버 스토리로 다룬 적이 있었다. 아직도 방송과 언론은 복지체계를 악용하는 사례들을 종종 대서특필한다. 물론 이것이 어느 정도 황색의 성격을 띠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복지체계를 악용하는 사람들의 숫자와 이로 인한 피해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가령 어떤 노동자가 한 달에 2백만원 정도를 받는데 비해, 어떤 실업자는 실업보험과 사회보조금을 악용하여 3백만원의 수입을 올리고 매달 휴가를 즐기는 어처구니없는 사례도 독일에서는 비일비재하다. 일하지 않는 자가, 또는 일을 적당히 하는 자가 복지체계의 허점을 뚫고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은 국가의 재정을 축내고 취업자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개월 이상의 실직자에게 강제적으로 취업을 권고하는 조항이 등장하였지만, 이것도 특정 직장의 고용거부 혹은 빈자리의 부재 등을 구실로 빠져나갈 수 있다. 좌파로 간주되는 일부 단체들은 실직자들의 실업급여 취득을 보장하기 위해 아예 도장을 들고 구직자들과 합의하여 고용거부 혹은 일자리 부재 등의 도장을 찍어주는 사례도 있다.

또 결혼을 올리지 않은 채 남성과 살다가 아이를 낳았지만, 그가 죽거나 도주해 아이들을 혼자 키우는 여성은 약간의 양육비와 교육비, 힘든 노동으로 빠듯이 살지만 일정 수입을 가진 남성들과 결혼해 3번 정도 이혼한 여성은 아무런 걱정없이 평생을 즐길 수도 있다.

독일 복지체계 문제의 심각성은 특히 노인들의 생활에서 볼 수 있다. 20세에 취업하여 65세에 은퇴하기까지 꼬박 45년을 노동한 노인들이 매달 수령하는 액수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다. 만약 이들이 연금보험에 지출했던 돈을 개인저축과 투자에 돌렸더라면 그 돈만으로도 이들은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독일 복지체제의 문제는 일하지 않는 자의 풍요나, 복잡성 등에 있기보다는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컨셉의 문제이다. 개인과 가족을 대신해 국가가 복지를 보장하는 것은 사회적 유대관계를 강화하기보다는 이를 약화시켰다. 또한 동독의 '노동권'처럼 아예 실업 자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경쟁을 터부시할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개인의 능력과 건전한 경쟁을 신장하고 강화하는 대신 이를 떨어뜨렸다. 또한 복지체계 자체가 취업사회에 근거하다 보니 실업률이 높아지면 근본이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취업노동, 가사노동, 사회노동 등 노동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에 기초한 복지체계를 전개하지 못한 복지체계는 취업과 고용 이외의 상황을 모두 실업으로 인정해버린다. 취업노동이 앞으로 점차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에 비추어 볼 때 이 복지체계는 완전히 가동할 수 없는 낡은 체제이다. 취업이나 고용노동이 줄어들고, 노동의 볼륨이 낮아지는 것은 결코 비관적인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보다 많은 자유시간을 갖게 되고 취업노동 이외에도 자신의 필요에 따른 자가노동, 가사노동, 그리고 사회노동 등에 보다 많은 여력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조건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복지체계는 완전히 취업노동에만 기초하고 있기에, 실업시에도 취업노동의 수입수준을 보장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풀타임 노동이 점차 파트타임 노동으로 전환하고, 기타의 노동과 활동이 개인과 사회의 안정,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인정된다면 현행의 복지체계 또한 수정이 불가피하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은 개인의 생활과 만족을 위한 활동에 일정한 수입이 보장된다면, 억지스러운 공공노동이 아닌 사회활동에의 적극적 참여, 사회적 약자와 불이익을 받는 이들과의 연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사회노동 역시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 복지체제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지식정보사회에 걸맞은 적극적인 개인의 능력과 책임을 신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계적 평등과 평균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사람들을 피동적, 의존적 존재로 만들며, 지식정보사회에 필요한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할 것이다.

8. 자본주의의 혁명가 대처(thacher)와 사회민주주의의 셋째 길

최근에 한국의 좌파 혹은 진보진영이라 불리는 혹은 자칭하는 사람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성이 있다. 인정사정 없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신자유주의의 객관적 실체와 그것의 지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싶다. 자신이 반대하는 거의 모든 것에 신자유주의 마크를 붙여 무자비하게 비판의 메스를 가한다. 심지어는 dj정부도 신자유주의라고 그들은 비판한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잃어버린 진보진영의 정체성이 드디어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발견된 것이다. 필자는 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진보진영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에 자못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시대정신}에서 신자유주의를 여러 차례에 걸쳐 검토하였기에 여기서는 상술하지 않겠다. 다만 신자유주의의 대표자로 일컬어지는 대처에 대해서만 글의 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부연하고자 한다.

약 1년 전쯤,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홍콩의 한 일간지가 한 수필에서 20세기 최고의 혁명가로 두 명을 지목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레닌, 마오, 카스트로 등등 '혁명'이란 개념아래 필자가 상상할 수 있는 이름들과는 사뭇 다른 이름이었다. 그 기사가 지적한 두 명의 혁명가는 대처와 등소평이었다. 약간의 놀라움을 가지면서 필자는 이 시각을 나름대로 참 재미있는 발상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기사를 읽으면서 필자는 점점 기자의 입장에 공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기사의 요점은 간단했다. 대처는 자본주의를, 등소평은 사회주의를 변혁한 사람이라는 것이며, 그 변혁의 심도는 앞으로 러시아의 70년 실험보다도 깊을 것이며, 그 충격은 마오의 문화혁명을 뛰어넘을 정도라고 기자는 주장하고 있다.

대처주의는 주지하다시피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결합이다. 자유주의는 시장과 사회에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것이고, 보수주의란 전통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양자의 결합은 그러나 산술적 합을 넘어 보수당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전후 사민당 주도의 케인즈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이른바 자본주의를 다시금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했다. 대처가 등장하는 70년대 말, 영국은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은 70년대 초 금본위 체제의 붕괴와 오일쇼크로 인한 인플레와 구조조정, 경제의 세계화, 대량실업 등으로 특징 지워졌으며, 기존의 케인즈주의적 대안들은 새로운 처방을 내놓지 못한 채 대중들로부터 극도의 불신을 받았다.

대처주의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존의 유효수효 창출정책을 포기하고, 통화공급 정책을 통하여 인플레와 실업을 해결하고, 시장에 대한 국가개입의 축소와 자율성의 보장, 복지국가의 해체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새로운 자유주의(neo-liberalism)를 내걸었다. 대처주의는 복지국가라는 기존의 보수주의 전통과 결별하였지만, 가족과 전통적 권위 등의 가치를 주장하면서 새로운 보수주의(neo-conservatism)를 제기했다.

대처주의가 혁명적이라는 것은 70년대 중반이후 변화한, 그리고 변화중인 사회에 적합한 처방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민족국가의 약화에 대한 대안으로 기존의 국가가 책임져온 사회보장을 개인의 능력개발과 책임강화, 가족 등과 같은 전통적 조직의 강화로 대체하고, 취업사회의 붕괴와 지식정보사회의 도래에 따른 의식 및 사회개혁을 실현하려 하였다. 대처의 파트너로서 기존 좌파의 비난의 표적이 되어왔던 레이건 미대통령의 재임시 국가, 경제, 사회의 협력을 강조하는 파트너십이 발전된 것은 따라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처주의의 가장 커다란 족적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국민적 의식개혁과 결합시키면서, 기존의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대체하는 새로운 가치를 사회에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대처와 레이건으로 상징되는 80년대의 신자유주의는 사회민주주의에 커다란 패배를 안겨주었다. 사민당들은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적극적으로 지적하였지만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변화를 통해 자신을 확인한다"는 말처럼 90년대 유럽에서는 다시 영국-프랑스-독일이라는 사회민주주의의 3각축이 부활되었으며, 미국에서도 클린턴이 당선되어 사회민주주의는 새로운 붐을 맞고 있는 듯 하다.

블레어, 쉬뢰더, 클린턴 등의 소위 '신민주주의자'들은 이른바 '제 3의 길'(the third way)이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사회민주주의가 선택한 세 번째 길이란 그들의 비판자가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와 커다란 차별성이 없다. 기든스는 '제 3의 길'을 논하면서, 그것은 자유주의적 길도,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적 길도 아닌 보수주의와 급진주의의 결합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가 선택한 세 번째 길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결합이다. 이러한 기존 가치의 조합을 통한 새로운 가치의 창출은 이미 사상사의 전통처럼 되어 있다. 맑스가 헤겔철학과 공상적 사회주의를 결합하여 맑스주의를 내놓고, 그람시가 크로체와 맑스를 결합하여 그람시주의를 만들어 냈듯이 제 3의 길은 철학적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결합한 것이다.

99년 6월에 발표된 독일 사민당과 영국노동당의 공동선언에는 '제 3의 길'이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기존의 평균주의에서 후퇴하여 개인의 책임과 능력을 강조하고, 시장의 기능과 국가의 기능을 조절하며, 기업활동을 촉진하고, 공급정책을 경제정책의 기조로 삼으며, 복지체제의 구조개혁, 노동의 유연화, 가족의 강조 등이 공동선언의 주요골자를 이루고 있다. 대처주의와 마찬가지로 '제 3의 길'도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의식개혁과 결합시키고 있다. '제 3의 길'이 지양하고자하는 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개인주의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의 집단주의의 폐해이며, 지향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 정치와 경제, 사회와 환경, 국가와 세계의 조화로운 결합이다.

'제 3의 길'에 대한 한국사회에서의 평가는 상당히 극단적이다. '제 3의 길'을 한국에 번역한 한상진 교수와 같은 사람들처럼 적극적인 지지자들은 이를 마치 한국사회의 대안과 같이 이야기하는 반면, 노동계와 학계의 일부는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변종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일축한다. 필자는 양자 모두 극단적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 3의 길'은 사회주의의 붕괴와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상황 속에서 제기되었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현존사회주의가 현존을 포기하면서 경제에 대한 새로운 구상이 요구되었으며, 경제와 국가, 시장과 사회, 사회와 생태에 대한 새롭게 제기된 문제와 고민에 대한 낡은 사회민주주의의 대답대신 새로운 대답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바로 '제 3의 길'이다. 지식정보사회로의 이전에서 자유주의와 공동체의 대립항을 어떻게 조화롭게 풀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정치의 동맹과 컴비네이션을 어떻게 짜나갈 것인가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고민이 바로 '제 3의 길'인 것이다. 따라서 '제 3의 길'은 여전히 복지에 대한 환상과 시장에 대한 과소평가, 추상적 어구로 가득 찬 50점에 불과할 수 있는 대답이지만 그것은 사민당의 정체성 위기 속에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그나마 그들이 모색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이 '제 3의 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마도 구체적 정책이나 대안보다도, 새로운 사고와 좌우를 넘어선 고민틀과 내용정도가 아닐까 필자는 생각한다.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대중정당이다. 59년 고데스베르그 강령을 통하여 사민당은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의 전환을 선언하였다. 쉬뢰더가 주장한 '새로운 중간'으로 사민당은 확실히 계급정당적 성격에서 탈각하여 신중산층과 여론선도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당으로 변모하려 하고 있다.

사민당의 새로운 노선이 과연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얼마 전 실업과 사회안정을 위한 독일판 노사정위원회인 '노동을 위한 동맹' 테이블에 참가했던 독일노조연합은 쉬뢰더 정부를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강력히 비난하였다. 사민당의 강력한 지지자이자 기반이었던 노조는 새로운 사회변화 속에서 당연히 과거의 전 계급을 대표하는 사회조직에서 특정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익집단으로 전화하여 사민당의 발목을 잡고 있다. 또한 대처만큼 철저하지 못한 사민당정부의 정책은 실업율의 감소와 고용의 확대 및 새로운 실험에도 적극적이지 못하다.

기든스도 자신의 저작에서 인용했던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보비오는 자신의 저작 '좌파와 우파'에서 좌우의 구분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케 하는(물론 자신은 여전히 좌우의 구분이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다-필자 주) 대표적인 현상으로 두 가지 개념을 들고 있다. 하나는 포함된 삼자(das eingeschlossene dritte)이며, 다른 하나는 포함하는 삼자(das einschliessende dritte)이다. 전자는 좌우의 중간을 점하는, 즉 중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방하는 세력을 의미하며, 후자는 좌우를 포함하지만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띠는 독자적 3자를 의미한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보비오는 녹색당을 들고 있다. 즉, 적색과 백색이 그 내부에는 다 포함되어 있지만 그 자신은 녹색의 정체성으로 외화된다는 것이다.

녹색당의 경우 과거 전투적 운동가들의 패거리정도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명백한 독일 정치의 3번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초기에 이들은 사민당의 표를 잠식했지만 지금은 기민련의 표도 잠식하고 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보통 독일 할머니 중의 하나는 선거시에 녹색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해 필자를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독일의 노인들은 대체로 보수적인데 이들이 녹색당을 지지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만큼 녹색당은 기반과 인물, 지향에서 기존의 당과는 다른 자기 정체성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 3의 길' 혹은 사민당의 신수정주의가 녹색당만큼 사민당의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려면 명확한 의식개혁을 통한 헤게모니장악을 위한 사업과 지식정보사회에 맞는 복지체계의 수립과 사회적 네트워크의 형성, 참여적, 창의적, 적극적, 연대적 개인의 육성이 요구된다.

9. 한국의 사회민주주의?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정직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민족주의와 맑스주의를 골수에 박고 있는 한국의 일부 진보세력에게 사회민주주의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사회민주주의는 개량주의의 대명사이며, 사회민주주의가 펼쳤던 복지국가정책은 '사회주의혁명을 가로막는' 혁명의 장애물이며 그저 노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펼쳤던 정책으로 폄하된다.

내심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또한 그러한 정책을 펼치는 사람도 대외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고전적 맑스주의의 잣대를 가지고 비난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이들의 사상적 자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는 자기 사고의 정체성과 정책대안의 부재를 의미한다.

내용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을 버젓이 깔고 있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대외적으로는 포괄적인 정치세력화를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거의 순수한 계급정당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남의 것을 가져오면서 그것이 남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부끄러워서일까, 아니면 과거의 정치적 성향이 아직도 남아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일까.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수정일수도, 사회주의의 지양일수도 있다. 어느 것도 사회민주주의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 근 150년에 걸친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이다. 맑스주의의 프리즘과 레닌주의의 렌즈를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던 사회민주주의는 알맹이와 껍데기가 분리된 채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앞서, 사회민주주의가 왜 등장하게 되었고, 그것이 어떠한 내용을 가졌기에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지금까지 버텨왔는가, 그리고 그것의 공과는 무엇이며, 한국사회에는 어떻게 수용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고민이 배제된 사회민주주의로 은폐된 어떠한 시도도, 사회민주주의를 감춘 어떠한 시도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극단의 광기와 맹목의 추종과 절대의 배척이 지배해온 한국의 사상시장에는 한 사상의 진정한 내용과 역사적 컨텍스트와 창조적 적용이 자리잡기에는 너무 황량했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도, 진정한 사회민주주의도, 진정한 사회주의도 접해보지 못한 채 사람들은 동이 트는 것도 모르며 벌써 바람이 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