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와 사회복지
1.서론
공리주의는 행위의 기준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즉 사회의 최대다수 구성원의 최대한의 행복을 구하는 윤리관으로서 벤담과 밀이 그 대표적 사상가이다. 공리주의는 18세기 영국에서 발전한 도덕철학으로서 당시 영국사회 개혁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고, 고전경제학의 자유주의적 경제학을 뒷받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19세기 말에 나타난 신고전파 경제학과 피구 이후의 후생경제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런 관점에서 공리주의는 정통경제학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경제학에 큰 영향을 미친 공리주의를 사회복지학에서 중요히 보고 넘어가야 한다. 사회복지학와 경제학은 각 분야에 있어서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야할 경우가 많기에 경제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공리주의는 사회복지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물론 공리주의의 이론상 사회복지를 축소하는 부분이 대부분이었지만 사회복지학이 공리주의에 영향을 받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경제학과의 논쟁에서 그 영역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리주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공리주의 철학이 나오게 된 성립과정 및 그 내용을 알아보고 그것의 의의와 한계까지 살펴보고, 공리주의가 사회복지에 어떻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겠다.
2.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
벤담은 그의 최초의 공간 저서인 <정부론 단편>의 서문에서 자신의 기본공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라고 천명하였는데 이것을 공리성의 원리 혹은 공리주의라고 한다. 공리성의 원리는 쾌락주의와 최대행복의 원리로 분해될 수 있다. 벤담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하에 두어 왔다. 우리들이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지시하고, 또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만 고통과 쾌락뿐이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구하게 되어 있으며, 따라서 고통은 유일한 악이고 쾌락은 유일한 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리성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공리성의 원리란 그 이익이 문제되어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처럼 보이는가, 또는 감소시키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는 경향에 의하여 ---- 모든 행위를 시인하고 부인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쾌락이 유일한 선이라는 쾌락주의는 벤담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고 18세기 영국도덕철학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합의된 공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벤담 자신도 그것을 확신한 나머지 철학적으로 논증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사회문제에 적용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벤담이 말하는 쾌락과 고통이란 어떤 것인가? 쾌락에는 감각의 쾌락, 부의 쾌락, 숙련의 쾌락, 친목의 쾌락, 명성의 쾌락, 권력의 쾌락, 경건의 쾌락, 자비심의 쾌락, 악의의 쾌락, 기억의 쾌락, 상상의 쾌락, 기대의 쾌락, 연상의 쾌락, 고통경감의 쾌락 등이 있으며, 고통에도 거의 유사한 목록이 있다. 벤담은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쾌락과 고통의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경건의 쾌락, 자비심의 쾌락 등의 고등 쾌락과 악의 쾌락같은 저급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쾌락은 질적으로는 동일하며 단지 양적으로만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벤담의 양적 쾌락공리주의는 후에 밀의 비판을 받게 된다.
벤담은 여기서 두 가지 명제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첫째, 심리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의 원인은 쾌락추구와 고통회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명제이다. 둘째, 첫째 명제로부터 바로 고통이 유일한 악이요 쾌락은 유일한 선이라는 가치판단을 도출한다. 벤담은 첫째 명제를 당연시하여 이 심리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예외적인 존재는 없다고 단정하였다. 만일 이 주장이 심리적 이기주의를 의미한다면 규범윤리학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의문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이기적으로 밖에 행동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이들에게 윤리적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리주의 심리학은 경험적 증거에 의해 보강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사실판단으로부터 가치판단을 도출하는 것은 소위 자연주의적 오류에 관계된다.
공리성의 원리는 단순히 개인의 행복만이 아니라 고려되는 당사자 전체의 행복의 증진에 관련되어 있다. 어떤 행위가 사회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그것을 감소시키는 경향보다도 큰 경우에는 그 행위는 (사회전체에 대하여) 공리성의 원리에, 간단히 말하면, 공리성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서설>>에서는 최대행복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나 <<단편>>에 나타나 있는 것을 고려할 때 벤담이 사회의 행복을 극대화시키는 행위를 옳은 행위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최대행복의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의 양이 측정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합산이 가능해야 한다. 벤담은 쾌락의 계산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쾌락의 크기는 강력성, 지속성, 확실성, 원근성, 다산성, 순수성 등을 고려하여 측정할 수 있고, 이러한 쾌락측정방법을 관련당사자 모두에게 적용하여 산출한 후 합산함으로써 사회전체의 쾌락을 측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벤담은 이와 같은 쾌락계산이 결코 근거없는 이론이 아니며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고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개인의 행동선택에 있어서 쾌락계산이 전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정밀한 계산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관련당사자 모두의 쾌락을 합계하여 사회전체의 쾌락을 계산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벤담은 모두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폰 노이만과 모겐스턴은 열이론의 예를 들어서, 초기에는 신체적 느낌에 의존하여 온도를 대략적으로 측정하였으나 온도계의 발명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앞으로 정확한 쾌락측정기가 개발되면 수량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쾌락측정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쾌락을 사회전체적으로 합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나 개인의 신체적 조건, 성격, 기호가 다르기 때문에 개개인의 쾌락을 비교하여 합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3. 밀의 질적 공리주의
밀에 의하면, 공리의 원리는 행동들이 행복을 증진시키는 경향에 비례하여 옳고, 행복의 반대(불행)를 산출하는 경향에 비례하여 그르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벤담의 주장과 동일하다. 그러나 벤담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돼지에게나 합당한 철학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대응하여 밀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였다. 어떤 종류의 쾌락은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더 바람직하고 더 고상하다는 것이다. 소량의 고급쾌락이 다량의 저급쾌락보다 더 낫다. 그렇다면 고급쾌락과 저급쾌락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밀에 따르면 양자를 다 잘 아는 자가 선호하는 쾌락이 고급쾌락이며 쾌락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면 다수의 선호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쾌락의 질적 차이가 인정되기 때문에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쾌락의 질적 차이를 가리는 문제는 밀이 생각한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밀은 일종의 직관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양쪽을 다 경험한 자들이라고 해서 비슷한 선호를 나타낼 것인가? 그리고 쾌락전문가들 사이의 이견을 다수결로 해결하는 것은 너무나 임시방편적이 아닌가? 밀이 돼지의 철학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했지만 질적 구별의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질적 공리주의는 모호한 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만일 질적 구별을 가능케 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제시된다면 그것은 비쾌락주의적인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에 공리주의는 타격을 입게 된다.
공리주의가 무신론적 이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밀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신은 무엇 보다도 그의 피조물의 행복을 원하며, 이것이 그들을 창조한 신의 목적이라는 것이 참된 신념이라면 공리주의는 무신론적인 이론이 아닐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이론 보다 더 심오하게 종교적이다. 공리주의가 신의 계시된 의지를 최고의 도덕법칙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신이 인간의 행복을 원한다면 계명의 근본원리는 결국 공리주의에 기초해 있을 것이라고 밀은 주장한다. 신이 인간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진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과의 바른 관계성 가운데서 행복하기를 원한다. 만일 신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오히려 고통 가운데로 이끌어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 신에게 돌아오기를 원한다. 인간은 신을 떠나서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신학의 주장이다. 공리주의가 만일 신을 상정한다면 그 신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신에 불과하며 최고의 입법자의 권위는 갖지 않는 그런 신이다.
밀은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의 황금률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서 공리주의 윤리의 완전한 정신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밀은 크고 첫째되는 계명은 네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계명임을 무시했으며, 이웃사랑은 최대 행복의 원리라기보다 개개인의 성장과 행복을 중시하는 개인의 존엄성의 원리에 가깝다. 밀이 공리주의가 결코 무신론적인 이론이 아님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이고, 공리주의는 매우 세속적인 윤리학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벤담은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최대행복의 원리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제재때문이라고 하였다. 벤담에 의하면 물리적,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제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들은 사회적 후생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개인의 공리를 추구한다고 한다. 밀도 제재를 인정하지만 벤담과는 상이하다. 밀에 따르면 제재는 크게 외적 제재와 내적 제재로 구분된다. 외적 제재란 다른 사람이나 신으로부터 호의를 기대하거나 보복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이기적인 존재일지라도 이러한 외적 제재 때문에 공리의 원리에 따라 행동한다고 한다. 내적 제재는 의무감 혹은 양심인데 의무를 위반했을 때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밀에 의하면 이것 이외에 공리주의에 강력한 자연적 감정의 토대가 존재한다. 이 굳건한 기초는 인류의 사회적 감정이다; 그것은 동료인간들간의 일치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감정은 대부분의 개인들의 경우에 이기적 감정보다 약하지만 외적 제재와 더불어 타인들을 배려하도록 이끄는 궁극적인 제재이다.
밀은 인간성 속에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감정이 존재하며 이것이 공리주의 윤리의 궁극적인 제재로 본 점은 벤담과 매우 상이하다. 벤담이 인간을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본 데 반해 밀은 인간본성의 다양성을 인정하였다.
밀은 벤담과 마찬가지로 궁극적 목적에 관한 문제는 통상적인 의미의 증명은 불가능하다. 추론에 의한 증명이 불가능한 것은 모든 제일원리에 공통적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공리의 원리의 증거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소리가 들린다는 것의 유일한 증명이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는 사실인 것처럼 일반적 행복이 바람직하다는 것의 증거는 각자가 자기의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밀은 각 사람의 행복이 그에게 선이므로 일반적 행복은 모든 사람들의 집합에게 선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밀은 각개인이 자기의 행복을 원한다는 사실로부터 행복이 바람직스러운 것이라고 추론하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모든 사람은 모두의 행복을 원해야 한다고 추론한다.
밀은 행복이 목적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궁극적 목적이라는 공리주의의 주장을 어떻게 입증하려고 하는가? 밀은 행복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들, 예컨대 덕성, 권력, 명예 등이 궁극적인 면에서는 행복의 수단이므로 행복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하였다. 덕은 행복과는 무관하게 추구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리주의에 따르면 덕이 본래 목적의 일부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의 수단이 아니라 행복의 일부라고 한다. 그러나 덕이 쾌락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특히 고통으로부터 보호하지 않는다면, 원래 덕에 대한 욕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러한 연상이 형성되어 덕이 그 자체로 선이라고 느껴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 행복의 수단이거나 행복의 일부가 아닌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사실이라면, 행복이 인간행동의 유일한 목적이고, 행복의 증진이 모든 인간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다.(Mill, 1962, 292) 밀의 논증은 심리학적 사실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먼저 심리학적 반성이 필요하며, 동시에 그러한 심리학적 사실로부터 가치판단이 도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검토되어야 한다.
4. 공리주의의 의의와 한계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철학의 내용을 살펴 보았는데 공리주의가 규범윤리학으로서 과연 얼마만큼의 타당성이 있는지 고찰해 볼 필요성이 있다. 여기서는 공리주의의 본질적 내용들의 의의와 한계를 검토한다.
1) 쾌락주의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든 밀의 질적 공리주의든 공통적으로 쾌락주의적 속성을 지닌다. 밀이 말한 것처럼 공리주의는 행복이 바람직하고,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 목적의 수단으로서만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우선 직관적으로 쾌락 혹은 행복이 바람직한 것 가운데 하나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복이 유일한 본래적 선이라는 주장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밀은 궁극적 목적의 문제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도 쾌락주의에 대한 근거와 이유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각 사람은 행복의 달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한, 그 자신의 행복을 욕구한다는 사실이다. 밀은 이 이외의 이유나 증명은 제시될 수 없다고 하였다.
밀은 나아가 행복이 도덕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행복을 원할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행복 이외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행복의 수단이거나 그 일부라고 밀은 주장하였다. 밀은 심리적 쾌락주의를 근거로 해서 윤리적 쾌락주의를 입증하고자 하였다. 모든 사람이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것이 사실이며, 이 사실이 쾌락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시지윅은 심리적 쾌락주의에 반대한다. 쾌락 이외에에도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인간의 지식, 덕성, 종교, 의미 등에 대한 모든 욕구를 쾌락에 대한 욕구로 환원한다면 심리적 쾌락주의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우 이질적인 인간의 욕구를 모두 쾌락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환원하는 것이 단순성에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리적 쾌락주의가 인간의 모든 행동을 단순한 원리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에 타당성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신고전파 경제학의 소비자 선택이론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심리적 쾌락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쾌락만이 유일한 선이라는 윤리적 쾌락주의가 도출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무어가 제기한 자연주의적 오류의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 사실로부터 가치판단을 도출하는 자연주의는 오류라고 무어는 지적하였다. 그는 가치판단은 감각이나 내성에 의해 확립될 수 있는 보통의, 자연적인, 그리고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엄격하게 연역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자연주의를 오류라고 비판하면 대안은 직관주의와 주관주의이다. 직관주의에는 직관의 상충문제가 존재하고 주관주의는 객관적인 가치기준을 포기하기 때문에 규범윤리학으로서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자연주의가 분명히 논리적 비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명백한 오류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쾌락만이 유일한 가치 기준이라는 주장에는 만만치 않는 비판이 제기된다. 분명히 쾌락에는 나쁜 쾌락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 쾌락은 가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자유가 아니라 복종을 즐기며, 사랑에서가 아니라 증오에서 또한 생산적 일에서가 아니라 착취에서 쾌락을 얻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쾌락 대신에 인간 본성의 법칙에 따라 인간의 능력을 전개시키는 것을 선으로 제시하였다. 쾌락을 향유하는 것은 인간능력의 일면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잠재능력을 전체적으로 실현하는 자기실현이 선으로 고려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 결과주의
공리주의가 주장하듯이 행복이 유일한 선이라면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동이 행복을 얼마나 산출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중요한 것은 행동 그 자체 혹은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결과이다. 그러므로 공리주의에 따라 행위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결과의 예측이 완전히 정확해야 한다. 한 행동의 결과는 무한히 파급되어 나간다. 그리고 왕왕 결과는 예측과 다르게 나타난다. 사소한 행동이라면 스마트가 말한 바와 같이 돌을 던졌을 때 연못의 파문이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결과의 중요성은 매우 작아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계속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일차대전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과 같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될 수 있다. 이 경우 공리주의가 행위선택의 도덕적 기준으로서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행위나 제도의 결과를 예측함에 있어서 오차가 매우 크다면 차라리 어떤 안정적인 규칙에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행위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회과학적 기법의 발전이 공리주의의 적용에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의 예측이 어느 정도 정확한가에 따라 공리주의의 타당성은 다르게 될 것이다.
결과의 예측문제와는 별도로 결과의 정확한 수량적 측정의 문제가 존재한다. 주관적인 행복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사회전체적으로 합산할 수 있는가? 폰 노이만과 모겐스턴은 온도계의 발전으로 온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게 된 것처럼 공리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쾌락향유능력은 유사하다고 보아 사회전체적 합산이 가능하다고 공리주의자는 주장한다. 미세한 양인 경우에는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할 것이고 사람들의 향유능력도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백만장자의 공리와 빈민의 공리를 비교할 수 없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공리주의는 공리의 차이가 큰 행위들간의 선택에는 적용가능하나, 차이가 미세한 경우에는 적용이 곤란하다.
1930년대 이후 경제학의 전개처럼 효용의 가측성과 개인간 비교가능성을 모두 부정해 버림으로써 고전공리주의는 더 이상 경제학에 적용되지 못하게 되었고, 서수공리주의는 행동이나 제도의 판단기준으로서 그 내용이 너무나 빈약한 것으로 되어버렸다. 서수공리주의가 내 놓은 파레토 최적 기준은 행동이나 제도가 어느 누구의 공리라도 감소시킨다면 다른 사람의 공리를 아무리 크게 증가시켜도 그것을 옳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공리의 개인간 비교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면 행위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공통적인 가치기준은 사라지고, 각 개인의 주관적인 선호가 그 자신에게는 절대적인 의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자신의 공리를 감소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파레토 개선을 할 책임만 있지 사회적 행복의 증대를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희생할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이 자신이나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는 중요한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행위의 선택시에 결과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완전히 결과에 의해서만 판단한다면 악의에 의한 행동이 의도하지 않은 좋은 결과를 초래한 경우나, 선의에 의한 행동이 의외의 나쁜 결과를 가져 온 경우에 온전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선한 동기는 일반적으로 좋은 결과를 산출하기 쉽고, 악한 동기는 나쁜 결과를 산출하기 쉬우나 충분한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을 때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비록 불충분한 지식 때문에 의도되지 않은 결과가 산출될 지라도 동기는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결과뿐만 아니라 동기도 좋은 행동이 진정 바른 행동이라고 할 것이다.
3) 최대행복의 원리
공리주의는 사회전체의 행복의 최대화를 목적으로 삼는다. 공리주의는 사회의 모든 성원의 행복을 고려에 넣는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로 간주되어야 하며 어떤 사람도 하나 이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는 벤담의 공식이 적용된다. 사회의 모든 성원의 행복을 모두 합산에 산입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는 평등주의적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모두 고려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이기주의도 아니고, 타인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이타주의도 아니다. 공리주의는 양자를 매우 공평하게 고려한다. 인간의 자연적 성향이 자신의 이익을 과대평가하기가 쉬우므로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공평하게 고려하려면 매우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리주의가 이기주의로 타락하기 쉽다.
그런데 공리주의의 관심은 행복의 총합의 크기이지 내부구성이 아니다. 누가 얼마만큼의 행복을 누리는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갑의 효용 감소는 을의 효용 증가로 대체될 수 있다. 이것은 전체를 위해 개인이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자발적인 희생은 아름다운 행위이지만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은 개인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이런 점에서 개인의 권익을 충분히 보호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나 권리 등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정의를 다루는 부분에서 더 언급하게 될 것이다.
4) 분배적 정의
벤담에 의하면, 정의의 명령은 어떤 경우에 어떤 주제에 적용되는 자비의 명령의 일부에 불과하다. 벤담은 정의란 공리의 원리의 적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밀은 정의와 공리의 관계를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공리 또는 행복이 정사의 기준이라는 원리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방해물이 정의의 관념이다라고 하였다. 정의는 일반적 공리나 편의와는 전연 별개의 확실하고도 강력한 어떤 원리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는 공통적인 특징은 궁극적으로 공리라고 밀은 주장한다. 그는 시정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의 문제를 함께 다루었다. 먼저 기존의 여러 가지 정의 개념을 검토하는데, 법적 권리의 존중, 도덕적 권리의 존중, 공과에 따른 보상, 신뢰를 배반하지 않는 것, ‘공평무사’, 평등 등의 정의 개념이다. 이런 다양한 정의 개념의 공통성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밀에 따르면, 정의란 어떤 것에 대한 도덕적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권리의 존중이 바로 정의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권리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밀은 일반적 공리 이외의 이유를 제시할 수 없다고 한다. 권리의 개념을 확립하여 그것을 보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반적 공리를 증가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밀도 벤담과 마찬가지로 정의의 원리는 공리의 원리와 같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만 정의는 다른 도덕규칙보다 인간의 복지에 밀접하게 관련된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더라도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면 인간생활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은 정의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고, 따라서 더 절대적이고 명령적인 어떠한 사회적 공리에 대한 이름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공리주의적 정의론을 경제적 분배에 적용하면 부와 소득을 어떻게 분배하도록 요구하는가? 공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보상이 없으면 아무도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흄은 노동의욕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노동의 과실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사유재산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에서는 재산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근로할 의욕이 거의 없는 것이다. 죤 스튜어트 밀도 근면의 효율성은 그것의 과실이 노력하는 자에게 보장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였다. 노력이나 기여에 따라 차등 분배하고 분배된 것에 대한 권리를 각 개인에게 부여하는 것이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유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와 소득의 한계효용이 체감한다면 재분배를 통해 총효용이 증대될 수 있다. 그렇지만 흄, 벤담, 시지윅 등의 공리주의자들은 유인기능과 재분배의 혼란을 강조한 나머지 재분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총효용을 극대화하는 분배패턴은 사실판단의 차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즉 각 개인의 효용함수는 동일한가, 다른가? 한계효용은 체감하는가? 유인효과를 위해서 얼마만큼의 차등이 있으면 족한가? 등과 같은 사실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 따라 결과는 매우 상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리주의 정의론을 현실에 적용하기가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공리주의에 따른 분배는 모든 사람의 공리를 고려한다는 점과 한계효용이 체감한다는 가정의 경우에는 평등주의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매우 불평등한 분배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리고 공리주의 정의론은 분배갈등을 다루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개인이 자기의 만족을 극대화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가 만족을 극대화하는 것이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공리주의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합리적 선택의 원리를 사회에 적용한다. 이에 대해 롤즈는 공리주의가 개인들간의 구별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롤즈에 의하면 공리주의는 공평한 관망자의 관점인데, 공평한 관망자는 풍부한 상상력과 동정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욕망을 하나의 일관된 욕망의 체계로 구성한다. 개인은 사회라는 거대한 개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인내의 각부분들이 갈등하지 않는 것처럼 거대한 개인의 부분들도 갈등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매우 큰 빈부격차를 허용할 수 있고,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 점에서 공리주의는 롤즈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전체와 개인은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양자가 함께 발전해야지 어느 하나만 강조해서는 안된다.
5. 공리주의가 사회복지에 미친 영향
공리주의의 핵심은 1830년대 초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구제와 교육 및 공중위생 등과 같은 문제가 사회의 각 면에서 발생하게 되고, 이때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빈민법 개혁에 대한 명확한 입법원칙과 행정 기구의 개혁을 제시하였다. 공리주의가 벤담 이전에는 전무하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논의의 대상이라고 전제되고, 이제까지 논의해왔던 공리주의가 사회복지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이때가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벤담이 어떠한 원칙을 제시하였는지 알아보고 이러한 벤담의 공리주의가 현대사회복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겠다.
①벤담이 제시한 원칙들
당시 벤담은 구빈행정에서 다음과 같은 원칙들이 적용되어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빈곤의 의미는 빈곤과 궁핍으로 구분되어져야하며 구제는 궁핍에 국한되어야 한다. 여기서 제시한 빈곤은 노동이 가능한 상태를 말하며 궁핍은 노동이 불가능하거나 또는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둘째, 여기서 피구제민이란 타인의 노동에 의해 부양되고 있는자를 말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수준은 자립노동자의 생활상태보다 낮은 것이 되어야한다. 셋째, 재가복지를 시행해서는 안된다. 즉, 피구제민의 생계유지와 열등처우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조화시키는 방책으로 모든 구제는 시민생활로부터 격리된 국가적 규모의 수용시설에서 시행되어져야 한다. 넷째, 이러한 시설을 통제하기 위한 기구로서 국립자선회사를 설립하고 피구제민의 분류와 처우를 통계조사에 입각해서 실시하여야한다. 그리고 중앙당국과 지방당국의 관계에서 중앙당국에 지방당국이 복종하는 전국적인 구빈행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이 둘의 운영은 모두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②공리주의가 영국의 사회복지에 미친 영향의 재평가
이러한 원칙을 제시한 벤담의 공리주의는 그것이 제시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기치와 최대행복의 실현을 위해서는 재산의 분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일부는 현대 사회복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옳은 평가가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최대다수의 범주에 사회복지의 고유대상인 피구제민이 제외되었다. 둘째, 재산의 분배를 의미하는 평등의 원칙도 경제성장을 원만하게 한다는 이유로 배척되었다. 셋째, 모든 정부는 그 존재 자체가 큰 해악 이라는 공리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에 대한 최대한도의 자유방임주의와 국가권력의 최소화를 주장하였다. 넷째,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일반적인 경향을 설명한 쾌락과 고통의 원리가 구빈비용을 삭감하려는 지배계급의 의도와 맞물려져서 작업장을 구원억제적이고 일종의 처벌의 장소로 삼게 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끝으로 체드워크가 입안한 열등처우의 원칙과 작업장 제도는 모두 벤담으로부터 전수가 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공리주의는 개인적, 사회적, 시간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주장은 다수에 의해서 묵살될 수 있다. 사회복지영역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사회복지에 영향을 미칠수 있는, 각 개인의 영역에 이러한 입장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말을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고 그러한 분위기에서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제까지의 국가 정책을 살펴본다면 아주 간단하게 증명이 된다. 이제까지의 정책은 분명히 성장중심의 정책이었다.
이는 총체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산출하는 대안을 선택한다는 논리로 자원량의 확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공정하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많은 노동자 농민들이 저곡가, 저임금 정책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현상을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논리로 자유경쟁의 폐혜인 빈익빈 부익부현상을 극복하려던 논리가 오히려 그 논리의 발전과 시장경제라는 상황과 맞물려 역효과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 따라서 공리주의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기치와 함께 그것이 재산의 평등한 분배를 주장했기 때문에 개혁적이며 사회 혁명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고 현대 사회복지의 성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는 재평가 되어야한다 공리주의는 결국 당시의 봉건적 절대주의에 대한 개혁을 주장했다는 제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맺음말
공리주의는 영국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내세적 행복보다는 철저히 현세적 행복을 중요시하고, 행복을 증대시키기 위한 도구적 이성을 사용하는 점에서 공리주의는 계몽주의적인 것이다. 이 공리주의가 사회도 하나의 정연한 질서를 가진다는 고전파 정치경제학과 결합하여 19세기 이후에 전개되는 자유주의 운동의 기초로 작용하였다. 밀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기초가 일반적 행복이라고 보았다. 공리주의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윤리학설이지만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사회복지에 있어서 공리주의의 철학은 사회복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론이 된다. 공리주의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고전경제학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철학적 배경이 되었고, 이는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국가의 개입자체를 부정하였다. 사회복지에 중요한 가치인 분배 역시 자유시장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에 사회복지의 축소로도 이루어졌다. 이 후, 공리주의는 롤스의 <<사회정의론>>에 의해서 강한 비판을 받았고, 경제학적에서도 대공황 이후, 국가의 개입을 적극 주장한 케인즈 이론에 의해서 자유방임적 자유주의는 가라앉게 되고 수정자본주의가 대두된다.
공리주의에 대해 알아보면서 벤담이 주장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단어 속에 가려진 최대 다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최대다수에 포함되지 않은 소수자, 우리는 그들은 사회적 약자라는 단어로서 표현한다. 사회복지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보다는 조금 더 가지지 못한 자의 행복을 먼저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도로서 공리주의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권익과 보호를 다시금 떠올려 보며 이 글을 마친다.